
저는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를 분석하면서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주로 보다가 자연스럽게 다른 유럽 리그 경기들도 함께 보게 됐습니다. 특히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에 들어가면 평소 리그에서 보던 템포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의 경기들이 펼쳐진다는 걸 여러 번 느꼈습니다. 최근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 맨시티, 첼시, 토트넘, 뉴캐슬이 모두 탈락하고 8강에는 리버풀과 아스날만 진출하면서, 프리미어리그가 정말 세계 최고의 리그인지에 대한 의문이 팬들 사이에서 커지고 있습니다. 막대한 자금력으로 이적 시장을 지배하지만 유럽 대항전에서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이 현상을 직접 경기를 보며 체감한 입장에서 분석해 보겠습니다.
체력 소모와 전술적 한계
프리미어리그가 유럽 대항전에서 고전하는 가장 큰 이유로 과도한 경기 일정과 선수들의 체력 문제가 꼽힌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실제로 유럽 5대 리그에서 가장 많은 경기를 치른 상위 6개 클럽이 모두 프리미어리그 팀들이며, 가장 많은 시간을 뛴 필드 플레이어 10명 중 7명이 프리미어리그 소속입니다(출처: UEFA). 여기서 필드 플레이어란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의 선수를 의미하며, 실제 경기 중 뛰는 시간과 거리가 체력 소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선수들입니다.
저도 경기를 분석하면서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의 스프린트 빈도가 후반으로 갈수록 눈에 띄게 줄어드는 걸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특히 연말 일정 이후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는 전반전에 보여주던 강한 압박이 후반전에는 현저히 약해지는 모습이 데이터를 보기 전에도 체감될 정도였습니다. 프리미어리그는 리그컵, FA컵 등 타 리그보다 훨씬 많은 컵 대회를 소화하며, 분데스리가나 리그앙처럼 주중 챔피언스리그 경기 전 리그 일정을 조정해주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프리미어리그 팀들의 전술적 특징도 체력 소모를 가중시킵니다. 하이 프레싱(High Pressing)과 빠른 트랜지션을 기본으로 하는 고강도 러닝을 모든 팀이 추구하는데, 여기서 하이 프레싱이란 상대 팀의 빌드업 구역까지 올라가 공을 소유하자마자 즉각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전술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의 스프린트 수치는 유럽 5대 리그 중 압도적인 1위이며, 고강도 러닝의 빈도와 거리도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제가 직접 레알 마드리드와 프리미어리그 팀들의 경기를 비교 분석했을 때, 레알은 경기 내내 템포를 조절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만 강도를 올리는 반면, 프리미어리그 팀들은 빌드업 과정에서도 계속 높은 속도를 유지하려다 실수가 나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단순히 체력 문제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고 봅니다. 파리 생제르맹이나 레알 마드리드도 클럽 월드컵을 치르며 피로 문제를 겪었고, 바르셀로나도 주전 선수들의 부상 이탈이 있었습니다. 현재 프리미어리그 상위권 팀들의 전력 자체가 과거만큼 강력하지 않다는 게 더 본질적인 문제라는 의견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슈퍼스타 부재와 클럽 위상
프리미어리그가 진정한 슈퍼리그로 불리지 못하는 핵심 이유는 슈퍼스타의 부재입니다. 현재 홀란드 한 명을 제외하면 발롱도르(Ballon d'Or) 후보 상위권에 프리미어리그 소속 선수를 찾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발롱도르란 프랑스 축구 전문지 프랑스 풋볼이 매년 선정하는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에게 주는 상으로, 사실상 개인 최고 영예로 인정받는 상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적료 지출 규모로는 라리가, 세리에A, 분데스리가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돈을 쓰는 리그인데, 시대를 대표하는 선수가 거의 없다는 건 아이러니합니다.
2000년부터 2023년까지 발롱도르 수상자 중 라리가 소속이 16명에 달할 정도로 라리가는 슈퍼스타의 산실이었습니다(출처: France Football). 90년대 세리에A 전성기에는 바조, 지단, 호나우두가, 2010년대 라리가에는 메시와 호날두가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과거 영상들을 분석해보니 이들 리그가 유럽을 지배하던 시기에는 명확한 '정점'이 존재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처럼 한두 팀이 리그 자원을 독점하면서 유럽에서도 경쟁력을 유지했던 겁니다.
유럽 대항전 성적을 보면 이 차이가 더 명확합니다. 과거 세리에A 전성기(1983년~1999년) 16년 동안 유럽 클럽 대항전 결승에 32번 진출했고, 1990년에는 유럽 대항전 3개 대회를 싹쓸이했습니다. 라리가도 10년 동안 챔피언스리그와 유로파리그 결승에 16번 진출하며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반면 최근 5년 기준 프리미어리그의 유럽 대항전 결승 진출 횟수는 7번으로 라리가, 세리에A 각 5번보다 약간 우위지만 압도적이지는 않습니다.
2010년대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 횟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레알 마드리드: 8회
- FC 바이에른 뮌헨: 7회
- FC 바르셀로나: 5회
이들이 늘 유럽 무대에서 증명해 온 반면, 프리미어리그 팀 중 유럽 대항전에서 꾸준히 성적을 낸 클럽은 사실상 맨시티가 유일합니다. 그런데 맨시티조차 펩 과르디올라 감독 체제에서 리그 우승 6번에도 불구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2번 결승, 1번 준결승에 그쳤습니다. 레알 마드리드의 3연패와 같은 압도적인 지배력은 보여주지 못한 셈입니다.
라는 의견도 있지만, 제 경험상 큰 경기에서는 개인의 결정력이 승부를 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 프리미어리그는 좋은 선수는 많지만 시대를 대표하는 선수가 부족하고, 이 지점에서 차이가 난다고 봅니다. 선수들이 생각하는 드림 클럽이나 커리어의 종착지가 아직 프리미어리그에 충분히 많지 않다는 건, 레알 마드리드·바르셀로나·바이에른 뮌헨의 철옹성 같은 위상을 프리미어리그가 아직 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프리미어리그는 현재 전 세계 팀 몸값 순위 탑 42개 클럽 중 19개가 프리미어리그 소속일 정도로 자본력은 압도적입니다. 하지만 이적료에는 돈을 많이 쓰면서도 주급 구조에서는 파리 생제르맹,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같은 팀들이 최상단을 차지하고 있어, 진짜 빅스타들을 유치하는 데는 불리한 구조입니다. 리그 내부 인플레이션도 문제입니다. 외국인 선수 비율 증가와 홈그로운 규정 준수를 위한 잉글랜드 선수 수요 증가로 프리미어리그 내부 이적이 선호되면서 몸값이 과도하게 부풀려지고 있습니다. 최근 이적생들의 퍼포먼스가 높은 이적료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투자 효율성도 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프리미어리그가 지금보다 더 유럽을 지배하려면 아이러니하게도 리그의 균형이 조금은 깨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프리미어리그는 구조적으로 모두가 강한 대신 압도적인 팀이 없는 리그에 가깝습니다. 이게 리그 흥행에는 최고의 구조지만 유럽 대항전에서는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한 팀 혹은 소수 팀이 자원과 전력을 압도적으로 끌어올려야만 지금의 재밌지만 피로한 리그에서 유럽을 지배하는 리그로 넘어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미어리그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리그이자 가장 많은 수익을 창출하는 리그임은 분명합니다. UEFA 랭킹에서도 유럽 탑 25개 클럽 중 12개가 프리미어리그 클럽이며, 중계권 수입은 다른 리그들을 압도합니다. 다만 진정한 슈퍼리그가 되려면 더 많은 슈퍼스타, 유럽 무대에서의 압도적인 지배력, 그리고 훨씬 효율적인 투자 구조가 필요합니다. 과연 5년 뒤 프리미어리그가 진정한 슈퍼리그로 발전할지, 아니면 현재의 전성기가 저물게 될지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