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TV 중계만 보던 시절에는 이강인이 그냥 '왼발 잘 쓰는 선수' 정도로만 봤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상암 경기장에서 직접 경기를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중계 카메라는 늘 공을 쫓지만, 현장에서 제 눈은 공이 없는 곳에서 다음 수를 설계하는 듯 움직이는 이강인의 발을 보느라 바빴습니다. 공을 쥐었을 때의 기술보다, 공이 없는 순간에도 쉼 없이 움직이며 시야를 확보하는 모습이 압도적이었습니다. 그제야 왜 이 선수를 두고 '세대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이라는 말이 나오는지 납득이 갔습니다.
스페인 축구가 이강인에게 심어준 것: '포지셔닝'이라는 무기
이강인이 스페인으로 건너간 건 2011년, 열 살이 갓 넘었을 때입니다. 당시 국내 유스 시스템과 비교했을 때 스페인식 훈련은 결이 전혀 달랐습니다. 한국 축구가 체력과 압박 중심이라면, 스페인 라리가 계열 유소년 훈련은 포지셔닝과 전술 이해를 훨씬 일찍 요구합니다.
포지셔닝은 마치 바둑에서 미리 앞 수를 내다보고 돌을 놓는 '수 읽기'와 같습니다. 저도 매주 조기축구를 나가지만, 이 '미리 가 있는 능력'이 발재간보다 훨씬 익히기 어렵다는 걸 뼈저리게 느낍니다. 공격 시에는 상대 수비 사이의 사각지대를 찾아 몸을 위치시키고, 수비 시에는 패스 경로를 차단할 위치를 선점하는, 공간 읽기 능력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저도 아마추어 동호회에서 팀 축구를 뛰다 보면 이 포지셔닝이 기술보다 훨씬 익히기 어렵다는 걸 매주 체감합니다.
이강인은 발렌시아 입단 초기에 인종차별적인 발언과 견제를 겪었다고 합니다. 열 살짜리 아이에게 그 환경은 분명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주전 자리를 꿰찼고, 2013년 바르셀로나 유스와의 8강전에서 결승골을 넣을 만큼 성장했습니다. 발렌시아가 2013년 말 6년 장기 계약과 함께 바이아웃 조항까지 걸어 이강인을 잡으려 했던 건 단순한 호감이 아니었습니다. 구단 입장에서 손에 잡히는 재원을 지키려 한 실리적 판단이었습니다.
제가 상암에서 직접 확인한 것도 바로 이 시기에 체득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TV 화면은 항상 공을 따라가지만, 현장에서는 공이 없는 이강인이 보입니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상대 라인을 스캔하고, 동료의 패스 경로를 열어주기 위해 한 발짝 비켜서는 움직임, 이걸 보는 순간 '아, 스페인에서 10년 넘게 다른 걸 배웠구나' 싶었습니다.
이강인의 발렌시아 유스 시절 핵심 성과
- 2013년 바르셀로나 유스전 결승골 및 베스트 7 선정
- 2015년 로케타스 데 마르 대회 MVP 수상
- 2017년 U20 발렌시아 대표팀 준우승, 대회 MVP 및 베스트 11 동시 수상
- 2017년 12월, 만 16세에 프로 데뷔 (손흥민·이승우·백승호보다 빠른 기록)
마요르카의 에이스에서 라리가 정상급 '플레이메이커'로의 도
2019년 U20 월드컵에서 골든볼을 따냈지만, 이강인의 발렌시아 1군 입지는 흔들렸습니다. 감독의 전술 구조 안에서 자리를 찾지 못했고, 결국 2021년 여름 자유 계약 신분으로 마요르카로 이적했습니다. 외신에서도 '재능 낭비'라는 우려가 나왔을 만큼 당시 분위기는 좋지 않았습니다.
전환점은 하비에르 아기레 감독이 부임한 2022-23 시즌이었습니다. 아기레 감독은 이강인을 팀의 핵심으로 명확히 지목하며 '스쿼드에서 가장 재능 있는 선수'라고 공개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감독의 신뢰가 선수의 플레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 때문입니다. 자유로움을 보장받은 이강인은 리그 6골 7도움을 기록하며 개인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고, 마요르카는 리그 9위라는 예상 밖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개념이 플레이메이커(Playmaker)입니다. 플레이메이커란 팀의 공격 흐름을 설계하고 템포를 조율하는 선수를 말합니다. 단순히 드리블이나 슈팅이 좋은 것과는 다릅니다. 경기의 흐름을 읽고 적재적소에 패스를 배급하며, 상황에 따라 직접 골에 가담하는 역할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이강인이 마요르카에서 보여준 건 바로 이 역할의 완성이었습니다.
현대 축구에서 플레이메이커를 측면과 중앙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선수는 극히 드뭅니다. 루이스 엔리케 감독이 이강인을 '판매 불가'로 분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2024-25 시즌 PSG의 챔피언스리그 우승 과정에서도, 로테이션 카드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이강인이 보유한 전술적 유연성은 벤치에서도 충분한 가치를 지녔습니다.
스페인 프로축구의 흐름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라리가에서 어시스트와 키패스(Key Pass) 기여율이 높은 선수일수록 팀 내 포지셔닝 유연성이 높다는 상관관계가 나타납니다. 키패스란 슈팅으로 직접 이어지는 결정적인 패스를 의미하며, 이강인의 마요르카 시즌 기록은 이 지표에서 상위권에 해당했습니다(출처: Opta Sports).
PSG '트레블'의 일원 이강인, 주전 경쟁을 넘어 '상수'가 되는 과
2023년 7월, 이강인은 약 310억 원의 이적료를 받고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했습니다. 같은 해 아시안게임에서는 일본을 꺾고 금메달을 획득하며 병역 문제까지 해결했습니다. 22살에 유럽 빅클럽 계약과 병역 해결을 동시에 처리한 선수는 한국 축구 역사에서 이강인이 처음입니다.

하지만 2024년 아시안컵 당시 손흥민 선수와의 갈등이 공개되면서 국내 여론은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저는 솔직히 팬으로서 실망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나이대에 짊어진 중압감을 떠올려보게 되더라구요. 실수를 실력으로 덮는 것이 프로의 자질이라면, 이강인은 그 숙제를 가장 혹독하게 치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갈등 자체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었고, 이강인도 공개 사과를 했습니다. 다만 그 이후로 이강인을 향한 비판이 실력과 무관하게 지속되는 건 다소 과열된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24살이라는 나이는 축구 선수 기준으로 아직 성장기입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한 건 분명 뼈아팠겠지만, 그 과정에서 팀의 트레블(리그, 컵, 챔피언스리그 3관왕)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트레블이란 한 시즌 안에 주요 세 개 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것을 의미하며, 유럽 최정상 클럽에서도 1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성취입니다.
UEFA(유럽축구연맹) 자료에 따르면, 챔피언스리그 우승 클럽에 등록된 아시아 국적 선수 수는 역대 손에 꼽을 만큼 적습니다. 그 명단에 이강인이 이름을 올렸다는 것 자체가 한국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입니다(출처: UEFA). 이강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PSG 내에서 자신의 존재를 '상수'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상수란 어떤 전술에서도 감독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고정 자원을 뜻합니다. 뎀벨레, 바르콜라, 크바라츠헬리아와의 경쟁은 혹독하지만, 제 경험상 이런 환경에서 버텨낸 선수가 결국 더 단단해졌습니다. 아마추어 수준에서도 포지션 경쟁이 치열한 팀에서 뛴 선수가 더 빨리 성장하더라고요.
지금 우리가 이강인을 바라볼 때 필요한 건 조금 더 긴 호흡입니다. 아시안컵 논란은 그가 앞으로 보여줄 플레이로 갈음될 문제라고 봅니다. 한국 축구 역사에서 이토록 볼 터치 감각이 유려하고 전술 이해도가 높은 선수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가 겪고 있는 이 시간이 단순한 슬럼프가 아니라 더 큰 선수로 가기 위한 성장통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차분한 시선으로 지켜봐 줄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