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가 3회 연속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우승국이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이 지경이 됐다는 사실이, 솔직히 처음엔 믿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때 '빗장 수비'로 세계를 호령하던 아주리 군단이 이름조차 생소한 팀에게 무너지는 모습은 단순한 이변이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 축구의 몰락은 우연이 아니라 구조가 만들어낸 필연입니다. 그리고 그 구조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데이터가 말하는 이탈리아 축구 붕괴의 민낯
세리에 A(Serie A)는 이탈리아 프로축구 1부 리그의 공식 명칭입니다. 한때 세계 최고 리그로 군림했지만, 지난 시즌 기준 20개 구단 중 12개가 적자를 기록했고 누적 적자 규모는 3억 6천만 유로에 달합니다. 여기서 누적 적자란 단일 시즌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쌓인 손실 총합을 뜻합니다. 리그 전체가 재정 위기에 빠지면 자국 유망주보다 즉각 전력이 되는 고령 외국인 선수 영입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탈리아 공격수 기근의 핵심 원인입니다.
재정 문제 외에 구조적으로 더 심각한 건 협회 내부의 거버넌스(Governance) 붕괴입니다. 거버넌스란 조직이 의사결정을 어떻게 투명하고 책임감 있게 수행하는지를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2006년 우승 이후 정치권과 연결된 인물들이 연달아 회장직을 맡았고, 전문성보다 인맥이 우선시 되는 낙하산 인사 문화가 뿌리내렸습니다. 그라비나 전 회장이 월드컵 탈락 직후 기자회견에서 "선수들은 영웅 같았다"는 발언을 한 것은 이 문화의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결과 앞에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수뇌부, 비슷한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기 때문에 그 공허함이 어떤 것인지 압니다.
유소년 육성 시스템의 실패도 수치로 드러납니다. 이탈리아는 U-17, U-20 유럽선수권대회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왔지만, 이 유망주들이 성인 국가대표팀까지 이어지는 비율은 현저히 낮습니다(출처: UEFA). 이를 파이프라인(Pipeline) 단절이라고 표현합니다. 파이프라인이란 유소년에서 성인 팀까지 선수를 체계적으로 연결하는 육성 경로를 뜻하는데, 이탈리아는 이 경로가 중간에 끊겨 있습니다. 로베르토 바조와 아리고 사키 같은 레전드들이 제시한 개혁안이 협회에서 사실상 무시됐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900페이지 분량의 유소년 개혁 보고서가 15분 만에 발표를 끝낸 채 서랍에 들어간 일화는, 제가 현장에서 만난 한 유소년 지도자의 말과 정확히 겹쳤습니다. "기껏 유럽 선진 축구를 공부해서 보고서를 써 올려도, 협회 윗분들은 읽지도 않아요. 그저 당장 이길 수 있는 덩치 큰 애들만 찾죠."
이탈리아 축구 위기의 구조적 원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세리에 A 재정 위기로 인한 자국 선수 출전 기회 감소
- 유소년 파이프라인 단절 — 유망주가 성인 무대로 연결되지 않는 구조
- 낙하산 인사 중심의 협회 거버넌스 붕괴
- 감독 선발 및 전술 결정에서 실력보다 인맥이 우선되는 관행
한국 축구가 이탈리아를 닮아가는 이유
제가 K리그 현장과 국가대표 A매치 취재를 다니면서 가장 서늘하게 느꼈던 건 경기력의 저하가 아니었습니다. 관중석의 공백, 그리고 경기장 밖에서 1인 시위를 하는 팬들의 뒷모습이었습니다. 팬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신호였습니다. 한국 축구협회가 최근 수년간 겪은 혼란은 이탈리아와 구조적으로 닮아 있습니다. 클린스만 감독 선임 과정에서 드러난 불투명성, 홍명보 감독의 특혜 선임 논란, 문화체육관광부 감사에서 확인된 도덕적 문제들은 팬들의 불신을 폭발적으로 키웠습니다. 협회는 이에 대해 FIFA의 정치적 독립성 원칙을 방패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FIFA 정치적 독립성 원칙이란, 각국 축구협회는 정부나 외부 기관의 간섭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입니다. 원래는 협회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인데, 실제로는 내부 비리와 무능을 외부 비판으로부터 차단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와 한국, 두 나라 협회 모두 이 원칙을 방어막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팬덤의 변화도 짚어야 합니다. 현대 스포츠 소비자들은 단순히 승패 결과가 아니라 절차적 정당성(Procedural Justice)을 봅니다. 절차적 정당성이란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됐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감독 선임 하나에도 '왜 이 사람인가', '어떤 기준으로 뽑았는가'를 묻는 팬들이 늘어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협회가 이 변화를 읽지 못한 결과, 한국 대표팀 경기는 역대 최저 관중 수를 기록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출처: 대한축구협회).
제가 현장에서 만난 유소년 지도자의 말이 아직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기술을 가르치고 싶어도, 협회는 당장 이길 수 있는 피지컬 훈련을 원합니다. 행정가들은 자기 라인 사람들 챙기느라 현장 보고서는 읽지도 않고요." 이 말이 이탈리아의 일화와 이렇게 정확히 겹칠 줄은 몰랐습니다. 구조가 같으면 결과도 같아집니다. 이탈리아가 수십 년에 걸쳐 보여준 쇠락의 경로를, 한국이 더 빠른 속도로 밟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그라비나 회장의 사임은 정부의 행정 명령이 아니라 국민 여론의 압박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방식입니다. 외부 행정력이 아닌 공론이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한국 축구 팬들의 목소리도 결코 무력하지 않다는 걸 보여줍니다. 다만 새 회장이 선출되어도 271명의 투표권자들이 기존 라인과 인맥에 따라 움직이는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얼굴만 바꾸는 것에 그칠 공산이 큽니다. 축구는 협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새벽에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의 것이고, 경기장을 채우는 팬들의 것입니다. 지금 당장 인적 쇄신과 투명한 거버넌스 확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 무관심의 파도는 일시적 침체가 아니라 돌이키기 어려운 하락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좋아지는 데는 오래 걸리고, 나빠지는 건 순식간입니다.
결국 축구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행정가의 책상 위 서류 뭉치가 아니라, 아이들의 땀방울과 팬들의 함성 속에 정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탈리아를 비웃을 수 없는 이유는, 우리 역시 '그들만의 리그'에 갇혀 소중한 팬들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빠지는 건 한순간이지만, 되돌리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